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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동물과 감옥 죄수의 쳇바퀴

» 빈센트 반 고흐, , 1890년, 캔버스에 유채,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9살, 6살 아이들에게 동물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다못해 동네 대형마트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에도 시련이 닥친다. 하필 장난감 코너 바로 옆에서 판매되고 있는 작은 동물들 때문이다. ‘세일 중’이라는 표식이 달린 케이지 안에 살고 있는 햄스터에 한껏 반한 작은 아이는, 몇 번씩 “햄스터 사 달라”고 성화다. 가격표를 보며 “이 정도면 싸다”고 거드는 큰 아이는 또 어떤가. 이런 아이들에게 ‘햄스터는 생명이고, 손쉽게 살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기란 참 힘들다. 

현실은 엄마의 설명과는 반대로, ‘건전지 따위 필요 없는 장난감’으로 잘 포장돼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야생동물인 햄스터를 장난감처럼 만들려다 보니 고육책으로 발명해낸 것이 쳇바퀴 아닌가 싶었다. 알다시피 햄스터는 야생에서 수십 km를 이동하는 것도 거뜬한, 굉장히 활동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넓은 케이지를 구입한다 해도 햄스터가 필요로 하는 하루 운동량을 모두 채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다 보니 쳇바퀴를 필수적으로 설치하는 거라 들었다. 쳇바퀴 위에서 발을 굴리는 ‘원형운동’이라도 해야 스트레스로 죽지 않기 때문이다. 갇혀 지내는 햄스터에겐 그나마 최선일 것이다.

갇혀 지내는 생명의 모습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90년 작 이 그것이다. 끝 모를 높다란 벽이 둘러싸고 있는 닫힌 감옥 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죄수들이 교도관들의 감시 아래에서 운동을 한다. 그런데 운동방식이 햄스터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하다. 마치 쳇바퀴 위에 선 것처럼 그들은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돌고 있다. 마트 안 햄스터가 물건 취급받는 것처럼 그들 역시 감옥 안에서는 더 이상 생명이 아니다. 죄수들은 사회에서 강제로 지워진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물원도 ‘거대한 마트’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부터 동물원은 갇혀있는 동물을 볼모 삼아 ‘야생을 파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동영상 뉴스 속에서 본 ‘뽀롱이의 아들’ 모습도 햄스터와 비슷했다. 동물원 직원이 실수로 열어둔 문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죄로 엽총에 맞아야 했던 암컷 퓨마 뽀롱이. 그가 동물원에 남긴 아들의 최근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상했다. 사육장 좌우를 잠시도 쉬지 않고 기계적으로 반복해 오가는 모습은 ‘죄수들의 원형보행’과 너무나 닮아 보였다. ‘어미가 사라지자 새끼들이 분리 불안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 설명하는 뉴스 아래에 달린 댓글 중 추천이 많이 달린 글은 바로 ‘영혼 탈출’이었다.

집에 있는 동화책을 펼쳐보면, ‘동물은 우리의 친구’라는 글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동물들에게 자유를 빼앗아 놓고는 친구로서 교감할 존재가 동물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다니, 이만한 기만도 없다 싶다. 마트 계산대에서 태그를 찍고 카드를 긁어 햄스터를 구입하는 것을 보여주고, 아무렇게나 휘휘 던져주는 건빵을 마치 재주부리듯 받아먹는 동물원의 곰에게 박수를 유도하는 어른들. 이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머릿속에 동물들은 어떤 존재로 자리 잡을 것인가. 친구는커녕 인간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란 편견이 자라지 않을까.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다녔던 ‘동물들의 감옥 순례’를 이제 나는 앞으로 더 못할 것만 같다.

» 빈센트 반 고흐, , 1890년, 캔버스에 유채,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9살, 6살 아이들에게 동물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다못해 동네 대형마트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에도 시련이 닥친다. 하필 장난감 코너 바로 옆에서 판매되고 있는 작은 동물들 때문이다. ‘세일 중’이라는 표식이 달린 케이지 안에 살고 있는 햄스터에 한껏 반한 작은 아이는, 몇 번씩 “햄스터 사 달라”고 성화다. 가격표를 보며 “이 정도면 싸다”고 거드는 큰 아이는 또 어떤가. 이런 아이들에게 ‘햄스터는 생명이고, 손쉽게 살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기란 참 힘들다. 

현실은 엄마의 설명과는 반대로, ‘건전지 따위 필요 없는 장난감’으로 잘 포장돼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야생동물인 햄스터를 장난감처럼 만들려다 보니 고육책으로 발명해낸 것이 쳇바퀴 아닌가 싶었다. 알다시피 햄스터는 야생에서 수십 km를 이동하는 것도 거뜬한, 굉장히 활동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넓은 케이지를 구입한다 해도 햄스터가 필요로 하는 하루 운동량을 모두 채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다 보니 쳇바퀴를 필수적으로 설치하는 거라 들었다. 쳇바퀴 위에서 발을 굴리는 ‘원형운동’이라도 해야 스트레스로 죽지 않기 때문이다. 갇혀 지내는 햄스터에겐 그나마 최선일 것이다.

갇혀 지내는 생명의 모습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90년 작 이 그것이다. 끝 모를 높다란 벽이 둘러싸고 있는 닫힌 감옥 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죄수들이 교도관들의 감시 아래에서 운동을 한다. 그런데 운동방식이 햄스터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하다. 마치 쳇바퀴 위에 선 것처럼 그들은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돌고 있다. 마트 안 햄스터가 물건 취급받는 것처럼 그들 역시 감옥 안에서는 더 이상 생명이 아니다. 죄수들은 사회에서 강제로 지워진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물원도 ‘거대한 마트’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부터 동물원은 갇혀있는 동물을 볼모 삼아 ‘야생을 파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동영상 뉴스 속에서 본 ‘뽀롱이의 아들’ 모습도 햄스터와 비슷했다. 동물원 직원이 실수로 열어둔 문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죄로 엽총에 맞아야 했던 암컷 퓨마 뽀롱이. 그가 동물원에 남긴 아들의 최근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상했다. 사육장 좌우를 잠시도 쉬지 않고 기계적으로 반복해 오가는 모습은 ‘죄수들의 원형보행’과 너무나 닮아 보였다. ‘어미가 사라지자 새끼들이 분리 불안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 설명하는 뉴스 아래에 달린 댓글 중 추천이 많이 달린 글은 바로 ‘영혼 탈출’이었다.

집에 있는 동화책을 펼쳐보면, ‘동물은 우리의 친구’라는 글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동물들에게 자유를 빼앗아 놓고는 친구로서 교감할 존재가 동물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다니, 이만한 기만도 없다 싶다. 마트 계산대에서 태그를 찍고 카드를 긁어 햄스터를 구입하는 것을 보여주고, 아무렇게나 휘휘 던져주는 건빵을 마치 재주부리듯 받아먹는 동물원의 곰에게 박수를 유도하는 어른들. 이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머릿속에 동물들은 어떤 존재로 자리 잡을 것인가. 친구는커녕 인간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란 편견이 자라지 않을까.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다녔던 ‘동물들의 감옥 순례’를 이제 나는 앞으로 더 못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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