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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놀이지능지수(PQ)의 시대이다

» 권규리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초등학교 6학년, 2학년 사촌동생과 공기총으로 참새를 잡으러 집을 나섰다. 그 당시에는 산과 들과 논에 참새가 넘쳐났다. 그 결과 농부들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농부들에게 공기총 구입을 쉽게 했으며, 참새를 퇴치하려고 집집마다 구입했다. 그래서 중,고생들이 총을 들고 새를 잡으러 다니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 되었다. 그 날, 들녘으로 다니며 참새 몇 마리를 잡았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큰 새를 잡으려고 숲을 헤치며 산속으로 한 참을 이동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형~~’이라고 외마디가 들려온다. 그 소리와 동시에 벌들이 순식간에 동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벌집을 건드린 것이었다. 순간, ‘도망가자’라고 외치며 동생의 손을 잡고 산 아래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생은 곧 뒤처지고 ‘형, 살려줘!’라는 간절한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뒤를 돌아보니 미쳐 따라오지 못한 동생이 벌에게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옷으로 벌을 쫓으면서 다시 손을 잡고 아래로, 아래로 쉬지않고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니 이젠 벌이 쫒아오지 않는다. ‘이젠 살았구나’ 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벌들에게 쏘였기에 여기저기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선 작은 집에 가서 작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임시방편으로 된장을 덕지덕지 붙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아침, 동생이 걱정되어서 작은 집에 들렀다. 그랬더니 동생의 얼굴이 심하게 부어있어서 차마 동생이라고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동생도 형의 얼굴이 엉망이라고 한다. 물론 나도 벌에 쏘인 것을 세어보니 60곳이 넘었다. 참, 사람심리는 비슷한가보다. 작은 어머니는 아들이 쏘인 것을 일일이 세어보니 110곳이 넘는다는 말씀을 하신다. 동생과 나는 서로 변형된 얼굴을 보며 깔깔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벌들은 말벌과 비슷했지만 말벌이 아닌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또한 그 와중에 총도 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내려왔다. 40년이 지난 오늘, 그 역사는 그 때 쓴 일기장에 생생하게 적혀있다.

한 번은 중1 때, 공기총으로 독수리 사냥에 나섰다. 물론 처음에는 참새를 잡았지만 우연히 멀리 미류(美柳)나무 꼭대기에 앉은 독수리를 발견하곤 잡고자 하는 본능이 발동했다. 그래서 500미터의 거리를 숨죽이며 낮은 포복자세로 전진했고, 나무에서 불과 20미터 거리까지 접근하여 낟가리 뒤에 숨었다. 하지만 그 나무의 높이도 15미터가 넘는 큰 나무였으므로 쳐다보니 독수리가 가물가물했다. 드디어 숨을 죽이며 공기총에 외알 2개를 넣어 장전을 마쳤다. 그리고 독수리를 향하여 조준을 하고 발사를 했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독수리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당연히 독수리를 잡았다고 생각이 퍼득 들었다. 그러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동시에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곤 2~300미터 앞의 논에 앉았다. 아마도 총알에 맞긴 맞았는데 정통으로 맞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총을 들고 열심히 독수리에게 달려갔다. 한 50미터까지 접근하자 독수리는 날아서 300미터 쯤 날아갔다. 그래서 다시 온 힘을 다해서 쫒아갔다. 그러자 다시 독수리는 300미터 쯤 날아가고 다시 쫓아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결국 오후 2시부터 시작한 추격전은 6시가 넘어서야 독수리가 깊은 산속으로 날아감으로서 종결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독수리는 천연기념물인데 도데체 왜 독수리를 잡으려고 했는지 참으로 철부지였던 시기다. 이 소년은 커서 대학생이 되었으며 졸업을 하기 전에 이미 광고회사를 만들어 13년 동안 오너를 했다. 또한 지금은 아빠가 아이와 할 수 있는 놀이 4,200개의 디베이스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의 아빠들에게 하루에 1분만 놀아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음을 전파하고 있다. 이 소년이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지능이며 또한 어른이 되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사람의 지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시대에 따라서 변하고 있다. 30~40년 전에는 IQ(intelligence quotient)검사를 했다. 주로 학교에서도 했는데 IQ가 104, IQ120 등의 숫자로 나타났다. 이 검사의 숫자를 통하여 지능발달의 우열을 측정하였다. 그러다가 90년 대 말부터 IQ검사가 퇴조하고 EQ(emotional intelligence)검사가 도입되었다. 1991년 피더 샐로비가 창안하였다. 이 것의 의미란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과 주위의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마음의 지능지수'를 뜻한다. 그리고 2000년이 넘어서는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이 각광을 받았다. 사람에게는 한가지 지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8개의 재능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인간의 사고를 8개의 영역으로 구분하였으며 다음과 같다. 1)음악적인 재능: 조수미나 모차르트, 2)신체적인 재능: 박찬호나 타이거우드, 3)논리적인 재능: 빌게이츠나 아인슈타인, 4)언어적인 재능: 세익스피어 5)공간적인 재능: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에디슨 6)대인관계의 재능: 세종대왕, 테레사 수녀 7)자기 이해의 재능: 괴테, 8)자연탐구의 재능: 파브르와 다윈을 사례를 들었다.

그런데 이 이론의 한계가 있다. 세계의 모든 위인들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세계 해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23전 23승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그 승리의 이면에는 대인관계가 탁월했음은 물론 천지의 변화를 읽고 적을 알고 나를 알면서 싸움으로서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으며 또한 물러설 때를 알고 또한 나설 때는 아는 전략가였으며 또한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한 휴머니스트였다. 이런 인생을 볼 때 과연 대인관계에 둘 것인지 또는 논리적인 재능으로 다룰 것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으며 위의 8가지의 카테고리로 담을 수가 없다.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다. 대인관계나 혹은 언어적인 재능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는 하얼빈에서 의거를 한 후 재판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재판관을 꾸짖는 담대함과 의연함,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정신은 담당 검사조차 존경을 표시하였다. 이런 경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다중지능의 장점은 사람의 능력을 오직 8개의 재능으로 구분함으로서 일반성과 객관성에 기여한 점은 인정된다. 하지만 인간의 궁극의 목적인 행복한 삶, 그리고 모든 사람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재능을 조기에 발견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면 부모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에 소질과 재능과 개성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론의 한계란 그런 재능을 발견한다고 반드시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돈을 많이 벌면 부자가 되고, 그러면 행복하다라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능력과 행복은 별개인 것처럼 부자와 행복도 별개의 카테고리다. 하지만 우리는 심정적으로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막연히, 아무 의심도 없이 믿고 있다. 그 결과 무인도에서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이치처럼 돈의 주인이 아니라 돈에게 끌려다니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내용은 최근 영국의 민간 싱크탱크에서 발표한 세계 151개국의 행복지수에서 알 수 있다. 행복지수 1등과 2등의 국가는 코스타리카와 베트남이 뽑혔으며 고도성장을 구가한 중국은 40위에서 20계단 하락한 60위가 되었으며 한국은 63위, 미국은 100위권 밖이었다. 위의 내용을 보면 국민소득과 행복지수와는 전혀 정비례하지 않음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 밖에 최근에는 대니얼 골먼의 SQ(사회지능지수)도 각광을 받았다. 그 개념이란 성공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작용을 바로 성공마인드의 혁명적인 전환이라고 그의 책에서 주장한다. 이 이론은 사회성의 성숙이야말로 성공의 기본적인 조건임을 강조하였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통하여 긍정적인 관계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의 저서는 5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으로 많은 사례를 통하여 그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고 금방 사회지능지수가 올라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결론은 읽어서 이해가 될 수는 있지만 금방 나의 지식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그 한계성을 지적하고 대안을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그것은 마치 성인이 대강당에서 석학의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았지만 저녁에 퇴근을 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90% 이상을 잊어버린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두뇌의 기억력의 한계를 말하며 또한 사람의 인성의 형성은 어린 시절에 대부분 형성되기에 쉽게 사회지능의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계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

필자의 주장은 미래는 놀이지능지수(PQ)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행복지능지수(HQ)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PQ가 발달한 사람의 경우, 복잡한 사회나 주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일지라도 이를 1차원화 또는 단순화를 시킴으로서 관계를 통한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최상위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복이다. 물론 성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공 역시 행복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을 행복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PQ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돈이 많아도 행복을 만들고, 유지하기가 어렵다. 위에서 언급한 EQ나 다중지능이나 SQ를 핵심내용을 살펴보면 한 인간의 성공을 말하고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정작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적다. 그러므로 이제는 궁극의 인생목표인 PQ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럼 자녀의 PQ의 발달을 위하여 아빠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아보자. 

바로 놀이가 그 중심에 있다. 아이가 어린 시절에 아빠가 많이 놀아준다면 바로 PQ가 발달하는데 그 이유는 놀이속에 그 발달 요소들이 다량 함유되어있다. 여기에는 우선 필자가 주장하는 ‘369법칙’을 통하여 살펴보자.

아이가 태어나서 3살까지는 신체의 접촉이 많은 신체놀이를 많이 하면서 키워야 한다. 놀이를 통해서 신체접촉의 횟수와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뜻이다. 신체접촉의 사회심리학적의미를 살펴보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만 가능한 놀이다. 그러나 싫어하는 사람과의 신체접촉이란 불쾌하며 또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사태를 유발하기도 한다. 아이와의 신체놀이는 아주 단순하다. 그저 아이를 안고, 업고, 무등을 태우고, 또한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는 아이에게 등을 두드리며 달래주고, 목욕을 시키는 것들이 신체접촉이다.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발생한다. 이 점에 대하여 호주의 자녀양육전문가 비덜프 박사는 ‘3살까지는 엄마가 키워라’라는 저서를 통하여 사랑의 전달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 전달과정은 놀이이지만 이는 아이의 두뇌가 아니라 신체에 기억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신체접촉놀이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아이에게 무한하게 제공하는 행위다.

6살까지는 도구놀이가 메인이어야 한다. 이 때의 아이들은 강아지와 비슷하다. 마음껏 뛰어놀아야 사지와 오양육부가 건강해진다. 또한 그럼으로서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 그것이 많다는 의미는 곧 창의성의 원천동력이 확장된다는 뜻이다. 이 때의 도구놀이란 바로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로 다양하게 놀 수 있다. 우선 신문지로 하는 칼싸움, 베게로 하는 베게싸움, 신문지 파이로 하는 전화놀이, 베게로 주고 받기, 종이컵으로 피라미드쌓기, 박스로 터널통과하기, 식탁으로 집만들기, 펫트병 야구, 동화책 공중야구, 양말 투원반, 지랄풍선 잡기 등이다. 아이가 4살이 되면 신체의 움직임이 3살보다 현저하게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칫, 신체발달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같이 신체발달은 자주 쓰는 부분이 발달한다. 비만 아이의 경우, 엄마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마구 먹이지만 정작 에너지를 적절하게 소모하지 못하므로서 비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빠와의 도구놀이를 한다면 그 에너지는 아이의 신체기능을 발달시키는 에너지로 변환된다. 특히 도구놀이 중에서 격파의 경우를 보면 팔꿈치 격파, 엉덩이 격파, 점프격파, 뒷꿈치 격파, 무릅격파 등이 있다. 이런 류의 격파를 하는 이유는 아이의 다양한 신체부위를 움직이게 함에 있다. 또한 이런 놀이를 함으로서 아이는 순발력이나 근력, 근지구력, 협응력, 평형감각 등을 발달할 수 있다. 바로 건강한 아이로 키운다고 보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빠가 아이와 놀아주기만 한다면 저절로 건강한 아이로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9살까지는 체험놀이가 메인이 되어야 한다. 이 때의 아이들은 지적호기심이 왕성하다. 사물을 오감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스스로 의문을 생산하면서 다양한 현상을 융합하려는 발상을 한다. 드디어 자기주도적으로 살려고 하는 자아가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체험활동을 매주 다녀야 한다. 그런데 아빠가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은 철렁할 것이다. 가뜩이나 바쁜데 매주 아이와 체험활동을 다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마시라. 꼭 그렇지는 않다. 이 말의 로고스란 그저 주말에 30분이나 1시간 정도 아이와 잠깐 체험활동을 꾸준히 하라는 뜻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란 간단하다. 아이와 아파트 단지나 주위의 학교 운동장에서 잠깐 공을 차고 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와도 된다. 대형마트의 수족관에서 물고기, 설치류, 파충류를 잠깐 구경하고 와도 된다. 주변에 대형 꽃시장이 있다면 그 곳에 가서 아이와 손잡고 그저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봐도 된다. 주변에 냇가가 있다면 아이가 돌을 던져서 ‘퐁~’소리나는 광경을 지켜봐도 된다. 아이의 손을 잡고 뒷산에 올라가는 것도 좋다. 이런 것이 모두 체험활동이다. 

그리고 1달에 한 번은 야외로 나가보자. 동물원, 식물원, 대형 수족관도 좋다. 또한 계절에 따른 다양한 놀이가 있다. 봄이면 뒷산에 가서 쑥을 뜯을 수 도 있고, 여름이면 족대로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고, 가을이면 배나 사과등을 수확하는 체험을 할 수도 있으며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거나 연날리기도 좋다. 이런 다양한 체험을 한다면 이득이 많다. 먼저 아이에게 우선 세상의 다양성을 알게 해준다. 또한 사물을 이해하고 나와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또한 그 이용법과 속성을 알게 된다. 드디어 이런 다양한 체험활동을 많이 하게 됨으로서 아이에게는 미래에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재료를 획득하게 된다. 또한 자연의 위대함을 스스로 깨닫는 계기가 된다. 

사실, 아빠들이 아무리 많이 놀아주어도 아빠만의 놀이에서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자연은 아빠보다 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선물한다. 아빠와의 거실놀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기에 이미 정형화된 환경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연이란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른 변화가 계속 이루어지고, 오전과 오후와 저녁에 따라 다르다. 또한 날씨와 햇볕과 바람과 온도와 습도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입체적이며 종합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아형성으로 이어진다.

신체놀이와 체험활동에서의 이득으로 창의성, 사회성, 배려 등 15가지의 인성이 발달하고, 체육심리학에서 말하는 순발력, 근지구력 등 9가지의 신체기능이 발달한다. 그런데 가장 큰 보너스는 이로 인해서 아이가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아빠와 아이와의 놀이강의의 사례를 보자. 놀이강의가 끝나면 부모코칭을 하며 자녀양육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한다. 그러면 사실 아이는 심심하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끼리 뒤에서 놀이를 하고, 또한 놀이를 만들면서 놀고 있다는 점이다. 한 번은 박스놀이가 주제였는데 부모코칭을 할 때, 아이들은 펼쳐진 박스속에 들어가서 서로 동굴놀이를 하기도 했다. 풍선놀이를 할 때면 서로 ‘나잡아봐자’ 놀이를 한다든지, 신문지 놀이의 경우, 서로 편을 갈라서 칼싸움을 하며 서로 다치지 않는 배려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놀이를 통하여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며 스스로 행복을 만든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 중심에 바로 놀이가 있다.

야외놀이의 하이라이트는 등산과 바닷가에서의 놀이다. 우리는 우울하거나, 속상할 때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거나 확 트인 바다를 보는 일이다. 그러면 속에 뭉친 마음이 풀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진다. 그럼 도대체 산 정상이나 바다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정답은 허공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산이나 나무나 구름을 보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빈 허공을 가장 많이 본다.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나 하늘을 가장 많이 본 것 같지만 빈 허공을 가장 많이 본다. 그리고 우리는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빈 허공은 존재가 없는 형태이지만 블랙홀과 같아서 우리의 복잡한 사념을 마구 빨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한없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곳에서는 많은 아이디어가 마음속에서 솟아난다. 

사실, 이미 마음속에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들어있다. 그러다가 사념이 물러나면서 비로소 아이디어가 고개를 내민다. 그러므로 자유정신은 곧 창의성의 모토이다. 창의성의 향상을 위하여 창의성 학원을 다닌다고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원천적으로 자유정신을 마음껏 느끼게 할 때 우리의 사고는 창의성을 저절로 생산한다. 또한 호연지기도 키울 수가 있다. 내가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의미와 ‘함께’라는 의미를 스스로 깨닫을 수 있다. 이렇듯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보다 자연은 더 많은 것을 아무 조건없이 마구 내어주고 있다. 

요즘 교육지상주의와 황금만능주의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많은 것을 얻는 것 같지만 부모들의 욕심이 너무 적은 듯 하다. 공부나 돈에 얽매인 결과 아이가 어린 시절에 행복을 누리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현상은 일종의 언발에 오줌누기와 같이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그 역기능과 부작용은 이미 사회에 만연하다. 당장 드러난 사회현상은 이혼의 폭팔적인 증가이다. 재력을 기본 베이스로 한 짝맞추기를 한 결과 경제력이 무너지면 쉽게 이혼한다. 때문에 잘 나가는 남편이 한 번 실패를 하면 곧 이혼으로 이어지기 쉽다. 전쟁에서 패배는 병가지상사라고 하거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무색해진다. 경제력의 담보는 마치 마지노선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혼한다. 아니, 도데체 성격이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결혼할 때, 성격이 같았다고 결혼을 한 것일까? 오히려 성격이 정반대인 경우에 끌리는 경우가 많다. 그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적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주 기본적인 인성이 상호간에 형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성이란 어른이 되어서 몇 주간의 교육으로 생기지 않는다. 이미 인성이 고착화가 되었다. 인성은 바로 어린 시절에 대부분 완성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공부지상주의에서 도외시한 인성이 바로 어른이 되어서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이야말로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은 화려한 결혼, 인생에 한번이라는 인식으로 접근하지만 사실, 우리 인생은 매 시각이 소중한 인생의 한 부분이다. 그렇게 고급호텔에서 결혼을 했다고 해서 결코 행복한 결혼을 담보할 수 없다.

 또한 공부지상주의의 열풍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청소년 사망률의 1위는 바로 자살이다. 선행교육, 특목고, 외고 등으로 대변하는 교육열풍은 그 누구도 잠재울 수 없는 포플리즘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S대에 들어갈 아이는 한정되어있고, 그 어렵다는 중상위권에 모두 몰려있으니 부모로서는 애간장이 타들어 갈 수 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공부에 올인을 하다 보니 아이들의 인성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저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교육하며 아이들은 공부기계로 전락한다. 청춘은 가슴이 뛰는 것이라고 했지만 청소년들에게 청춘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며, 진퇴양난이요, 백척간두에 선 듯한 생활을 반복한다. 또한 엄마들의 입장에서는 자식의 대학진학이야말로 자신의 성공인 양 혼신을 다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때론 성적이 떨어진 아이에게 “그렇게 공부하려면 죽어라‘는 폭언을 일삼고, 궁지에 몰린 아이는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도 없이 스스로 고민하다가 코너에 몰리고, 몰려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도 하는 현실이며 그로 인해 자살이 사망률 1위에 올라섰다.

공부지상주의의 폐해는 아이들에게 자립심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선생님이 꼭 있어야 공부가 잘 되는 티쳐보이가 생겼으며 엄마의 지시가 없으면 불안해하는 마마보이도 증가하고 있다. 결국 누가 관리를 해주어야 움직이는 아이로 변하고 있다. 이는 요즘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부모 밑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캥거루족의 증가로 연결된다. 그런데 한 번 캥거루족으로 변하면 쉽게 쫓아내기도 어렵다. 늘 엄마가 아이를 챙기고, 보살피며 살았기 때문에 이런 관계가 아이와 부모 모두 편할 수 있다. 하지만 부모는 늙어가고, 소득은 줄어들면서 갈등은 야기되고, 아이를 독립시키려고 하지만 결코 독립하려고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신세한탄을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 되고 만다.

4월초의 칼럼에서 스마트폰의 중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그 이 후에 강의를 하면서 10회 이상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대상은 보통 15명에서 40명이었다. 그랬더니 놀라운 통계치가 나온다. 돌 이후의 아이들부터 90% 이상 스마트 폰을 가지고 논다고 응답한다. 역시 아이에게 주는 이유도, 귀엽다고, 운다고, 떼를 쓴다고 준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심각성의 후폭풍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아마 3년이 지나면 부모에게 욕하는 아이와 폭력성있는 아이가 현저하게 증가하여 가정교육의 개념이 점점 퇴색되고, 아이를 키우기가 더욱 힘이 들 것이다. 어른들도 카지노에서 중독이 되면 이혼하고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 말은 혼자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인성의 형성이 완성된 어른들도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아이의 경우는 그 위험성은 실로 엄청나다. 비유를 들자면 TV의 중독이 1이라면 PC중독은 10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마트폰 중독은 아마 100이상이라고 예측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나이가 돌까지 내려갔다는 사실에 있다. 이제 뇌가 서서히 성장하는 시기에 스마트폰을 사용함으로서 그 중독성이 강하고, 뇌과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전두엽에 변형이 예상된다. 이 말은 곧 뇌의 기형적인 발달을 가져오고, 이는 심각한 뇌의 부조화를 가져오게 됨으로서 행복의 대상이어야 할 아이가 골칫거리로 전락라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황금만능주의와 공부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돈만 많이 벌면 행복해진다고 믿었지만 돈과 행복은 별개의 카테고리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처녀총각들은 행복한 결혼만 생각했지 어떻게 배우자와 행복하게 살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으며 또한 어린 시절에 형성되지 못한 배려나 언어표현이나 사회성의 부족으로 심각한 이혼위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내 아이가 공부만 잘하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때론 그로 인해 내 아이가 자살함으로서 부모의 넘치는 사랑이 오히려 아이를 사망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놀아주지 않는 부모들로 인하여 사회성이 형성되지 않고, 그로 인해 왕따를 당하고 또한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깨진 독에 물을 붇는 것과 같이 부모의 사랑을 아이에게 강요함으로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고 또한 이로 인해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다.

미래는 놀이지능지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아이의 성적보다 이것이 먼저 발달해야 한다. 이것은 아빠들이 아이와 많이 놀아주면 저절로 형성되고 발달한다. 바로 놀이를 통하여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인성을 형성하고, 또한 많은 행복을 맛보고,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 행복은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어린 시절에 행복했던 아이들이란 이미 몸에 행복 그 자체가 메모리가 되어있다. 그러므로 30년 전에 탔던 자전거를 금방 탈 수 있는 자전거법칙과 같이 어른이 되어서도 또 다시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 어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매일 먹을 물고기만 잡아다 주면 아이는 끼니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이는 스스로 잡을 수가 없다. 바로 어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유산이다. 지금도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려고 하는 부모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란 스스로 벌어봐야 그 소중함을 알고, 또한 아끼는 법을 알 수 있다. 공짜로 돈을 얻으면 스스로 지키기란 매우 어렵다. 바로 아빠들이 아이와 많이 놀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립심과 독립심을 향상시키는 초석이다. 또한 아이와 함께 자연에서 많은 체험활동을 한다면 더욱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자연은 늘, 부모보다 위대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글을 쓸 때, 주로 공원이 딸린 도서관에 간다. 어제는 유치원에서 10여명의 아이가 선생님과 놀러왔다.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잔디에서 떨어진 잎을 줍더니 몇 조각 되지 않는 것으로 눈날리기를 하면서 논다. 또한 그 작은 잔디밭에서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고 달리기를 하며 환하게 웃는다. 이 모든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넓은 행복으로 느껴지고, 부모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 부모들은 너무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나 넘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협박일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아이의 행복을 빼앗아 갈 수 있음이다.

아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칠 것은 행복이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까르르 웃는다면 집안은 금방 행복바이러스로 가득하다.

행복은 또 다른 행복을 부른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중심에 놀이가 있다.

미래는 놀이지능지수(PQ)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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