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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많은 접수대 앞에서 “성관계 언제? 낙태경험은?”

임신 걱정에 병원 찾은 20대
간호사 질문에 수치심 느껴
여성민우회 800명 설문결과
64.3% “산부인과에 거부감”여성이 불편한 산부인과

20대 김효주(가명)씨는 최근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임신한 게 아닐까 걱정되어 산부인과에 들렀다. 접수대로 다가갔더니 간호사가 대뜸 물었다. “성관계 경험 있어요?” 김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 20대 여성이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씨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별생각 없이 산부인과를 찾은 일을 후회했다. “환자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산부인과를 골라 갔어야 했어요.”

 또다른 20대 여성인 이미경(가명)씨는 얼마 전 어머니와 함께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다. 생리불순 때문에 방문했는데, 접수대 간호사의 첫 질문은 상상을 넘어섰다. “낙태 경험이 있나요?” 곧이어 “성 경험을 언제 했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어머니가 곁에 있어 이씨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지극히 사적인 그런 질문은 남들이 없는 곳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씨는 산부인과를 갈 일이 생겨도 자꾸만 꺼려져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김씨와 이씨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5월부터 산부인과 진료 경험이 있는 여성 1000여명을 상대로 산부인과 이용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다. 210명의 1차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산부인과에 대한 거부감’ 항목에서 응답자의 3분의 2에 가까운 64.3%가 “거부감을 느꼈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진료에 대한 두려움’(56.3%)이 가장 많았다. 사회적 시선에 대한 부담(30.4%), 질병이 발견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3.7%) 등이 뒤를 이었다. 중병에 걸렸을까 걱정하는 마음보다 산부인과 진료 자체가 더 두렵다는 뜻이다.

 산부인과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를 묻는 주관식 질문에서 응답자의 상당수는 ‘굴욕, 불편, 불쾌, 무서움, 민망, 수치심, 차가움’ 등 부정적 단어를 적었다. ‘사랑, 생명’ 등 긍정적 이미지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심지어 조사 대상자 가운데 상당수는 진료와 무관한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고 하소연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평생 한번 이상 찾게 되는 산부인과를 왜 상당수 여성들은 불편하게 느껴야 할까? 는 10대 소녀부터 완경 여성까지 누구나 편히 발걸음을 할 수 있는 산부인과를 만들기 위한, 작지만 착한 변화들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엄지원 기자 

뒤에 사람많은데 “성관계 언제? 낙태 경험은?”

여성이 불편한 산부인과
“부부관계 만족 위해 수술 하시죠” 굴욕주는 의료진접수대부터 진료·시술까지 
의료진 노골적 발언에 민망 
사전피임약 처방전 필요한데… 
여성들 심리적 부담 커 고민 
환자 배려 의료지침 등 필요

지난 6월 정부는 사전피임약을 전문약으로 분류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여성들이 산부인과를 찾을 일이 더 많아질 수 있다. 이를 두고 여성들은 산부인과에 가는 것 자체가 눈치 보이는 사회 분위기를 지적한 바 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산부인과 진료 경험이 있는 여성 21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는 ‘외부의 시선’ 못지않게 산부인과 진료 자체에 대한 여성들의 두려움이 실제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설문 특성상 응답자의 신상과 구체적인 피해 일시·장소 등을 밝히진 않았지만, 여성들은 산부인과에서 겪은 수치와 불편을 설문지에 빼곡히 적었다.

신지은(가명·36)씨는 얼마 전 산부인과에서 느낀 굴욕감이 생생하다. 아이를 낳고 정기검진차 방문한 신씨에게 의사는 은근히 ‘수술’을 권했다.

“출산을 한 뒤니 부부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이참에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그가 권한 것은 여성 성기를 성형하는 수술이었다. “배려인지 희롱인지 알 수 없는 제안”이었다고 신씨는 말했다.

실제로 설문조사에 응한 여성들은 진료가 시작되는 접수대에서부터 낙태경험 또는 성경험을 묻는 수치스런 질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어느 여성은 “진료 접수 때 ‘냉이 많아져서 병원에 왔다’고 했더니, 접수대 간호사가 큰 소리로 ‘성병이네요’라고 말해 매우 불쾌했다”고 적었다.

진료 시작 뒤에도 수치심을 주는 의료진의 발언이 이어졌다고 응답자들은 적었다. 특히 “성경험이 있느냐”고 묻는 의료진의 태도가 당혹스러웠다고 여성들은 밝혔다. 어느 여성은 “성경험이 없다”고 답했다가 “검사할 때 번거롭다. 솔직히 말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 뒤로 가급적 산부인과에 가지 않는다”고 이 여성은 밝혔다.

의료진이 성경험 여부를 묻는 것은 관련 진료에 필수적인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험이 있든 없든 “왜 그런 정보가 필요한지 사전 설명 없이 다짜고짜 물어 불쾌했다”는 게 처음 산부인과를 방문한 여성들의 이구동성이다. 여성민우회 조사를 보면, 산부인과 방문 당시 성경험이 있었던 경우는 69.5%, 없었던 경우는 29.5%였다.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으러 갔던 어느 여성은 “결혼 안 했으면 처녀막이 상할 수 있으니 검사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자신을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처녀성’ 운운하는 발언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응답자는 적었다. “몇번 경험해봤나”, “최근엔 언제였나”, “첫 경험이 언제인가”, “남자친구 말고 섹스 파트너가 있나” 등을 아무렇지 않게 묻는 일은 점잖은 축에 속했다. 이들이 기록한 의료진의 어떤 발언은 그대로 옮기기에 민망할 정도다.

“성기 모양이 참 예쁘다. 남편이 함부로 하지 않는가 보다.” “가슴이 작아서 사진이 찍히려나 모르겠네.” “어린데 왜 산부인과에 왔을까?” 심지어 체모가 많은 것을 보고 “남편이 좋아했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경우도 있었다.

환자보다 의사 중심으로 꾸며진 진료 환경에 대한 여성들의 성토도 이어졌다.

다리를 위로 향한 채 눕게 돼 있는 산부인과의 ‘진료의자’를 응답자들은 ‘굴욕의자’, ‘쩍벌의자’로 부르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한 여성은 “진찰대에 다리를 벌리고 올라가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해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적었다.

자궁암 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았던 여성은 “의사가 들어오기 전 속옷을 벗고 다리를 벌린 채 준비했고 뒤이어 들어온 의사는 아무 설명도 없이 진료도구를 질 내부에 집어넣어 검사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의 최안나 대변인은 “산부인과 진료는 특히 예민한 분야이므로 성경험 여부 등 구체 정보가 왜 필요한지, 진료 과정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상세히 설명하고 의견을 구하는 건 당연한 절차”라며 “산부인과의 진료 서비스가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일부 환자 눈높이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민우회는 이달 중 1000여명에 대한 실태조사 최종 결과 분석이 끝나면 전문의·보건전문가 등과 간담회를 열어 환자를 배려하는 산부인과 의료 지침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산부인과 바꾸기 프로젝트’를 이어갈 계획이다.

김인숙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는 “왜 여성들이 산부인과에 가는 데 부담감을 느끼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 앞으로 더 나은 산부인과 진료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밝혔다.

는 ‘여성이 불편한 산부인과’를 ‘여성이 행복한 산부인과’로 바꾸기 위한 제보와 의견을 받아 관련 보도를 이어갈 예정이다.

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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