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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성폭력 보도와 착시 현상

» 성폭력 추방을 위한 시민모임 ‘발자국’은 아동 성폭행범 처벌 강화를 촉구하며 아이의 발바닥에 ‘지켜주세요’, ‘밟지 마세요’라는 글귀를 쓴 뒤 사진으로 찍어 온라인에올리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쿵쾅쿵쾅 심장이 뛰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며칠 전 자정께 퇴근을 하는데 내 다리는 심하게 후들거렸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던 길이었다. 회사 옆 아파트 지하 1층에 주차해 놓은 차까지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지…. 운전석에 앉으니 겨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이렇게 말한다. “어젯밤에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산책 가려다 무서워서 그만뒀어. 앞으로 밤에 운동 못 나갈 것 같아”라고. 집에서 독립해 작은 오피스텔에 사는 20대 미혼 여성 후배는 최근 부모에게서 ‘세상이 하 수상하니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눈만 뜨면 쏟아지는 성폭력 뉴스로 사람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외출과 활동에 제한을 받고 있으며, 공포심이 내면화되고 있다. 언론이 그동안 외면해오던 성폭력 실태를 드러내고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최근 언론의 보도 행태는 그런 긍정적인 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문제가 많고 도가 지나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은 성폭력 사건만큼이나 최근 성폭력 보도가 무섭다. 언론이 성폭력 정황을 지나치게 자세히 묘사하면서 독자들의 관음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성폭력으로 중요 부위가 5㎝가량 손상됐다고 굳이 만천하에 알릴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 자극적인 보도는 여성들의 불안감을 조장하고,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2차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최근 언론 보도는 또 많은 이에게 성폭력에 대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성폭력이 과거보다 급증했다고 인식하게 만들어 공포를 조장하고, 성폭력 가해자는 포르노를 많이 보는 빈곤층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언론이 성폭력의 일부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대검찰청이 집계한 통계를 보면 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가 10년 사이 2배로 늘었다. 그러나 이런 통계만을 바탕으로 성폭력이 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성폭력 범죄 신고율은 연간 7~8%에 불과하다. 그만큼 숨겨진 범죄가 더 많다. 최근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신고율이 높아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성폭력 보도가 과거보다 늘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포르노를 즐겨보고 술을 많이 먹는 일부 빈곤층만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일까. 성폭력 관련 연구를 해온 권인숙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는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꼭 계층적으로 낮다는 연구 결과는 없다”며 “언론에서 집중 보도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가해자는 전체 사건의 1~2%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직장에서 대놓고 포르노를 즐겨보는 상사,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여성의 엉덩이를 은근슬쩍 만지는 이름 모를 남성들, 술자리에서 음담패설을 필수코스로 여기고, 노래방에 가면 여직원에게 블루스를 추자는 남자들…. 비틀리고 왜곡된 성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은 어쩌면 일상적이고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물론 강화돼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피해자 지원 시스템 개선, 아동 돌봄 체계 강화, 남녀 불평등 문화 개선, 올바른 성교육과 성폭력 예방 교육 강화, 인권의식 고취와 빈부 격차 해결 등 다양한 사회문화적 방안들이 함께 나와야 한다. 술, 포르노, 게임, 일부 범죄자의 비정상적 성충동을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면 잠재적 피의자인 남성들의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성폭력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양선아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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