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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30분만 되면 ‘강제 소등’하는 회사


7시30분에 불끄는 회사…‘저녁 있는 삶’이 현실로

는 ‘저녁 있는 삶’ 기획을 통해 ‘장시간 노동’을 개선하기 위한 과제와 대안들을 제시했다.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시도는 이미 진행중이다. 뿌리 깊은 야근 관행을 과감히 끊어낸 사례를 소개한다.

유한킴벌리, 3년째 강제 소등 

필수 야근자만 제한적으로 허용 

야근 20%서 8%로 줄어들어 

시차출근제 등도 호응 높아 

“회사 지지·신뢰가 성공 요인”

사내 커플인 ‘워킹맘’ 김현경(31)씨 부부는 같은 회사에 다니지만 출퇴근 시간이 다르다. 김씨는 오전 8시까지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고, 남편은 오전 9시30분 출근, 오후 6시30분 퇴근이다. 덕분에 부부는 맞벌이인데도 친정·시댁 부모나 보육 도우미의 손을 빌리지 않고 5살, 2살 두 아이를 기르고 있다. 아이들은 부모가 회사에 있는 동안 어린이집에서 지낸다. 출근하는 남편이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맡기면, 아내 김씨가 퇴근길에 아이들을 데려와 저녁시간을 온 가족이 함께 보낸다. “오후 5시에 퇴근한다고 눈치 보이진 않아요. 늦게 출근한다고 눈치를 주는 일도 없고요.”

부부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건 회사 차원의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김씨 부부가 다니는 유한킴벌리는 ‘시차 출퇴근제’를 통해 오전 7~10시, 오후 4~7시 사이에 출퇴근할 수 있는 ‘권리’를 직원들에게 보장한다. 이 제도를 활용해 오전 8시30분 이전에 출근하거나 오전 9시30분 이후에 출근하는 직원이 본사 직원 580명 가운데 80여명(14%)이다. 2011년부터는 ‘탄력 점심시간제’를 도입했다. 출근시간에 맞춰 점심시간 역시 낮 11시30분~1시30분 사이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탄력적 출퇴근 시간제는 비교적 빠르게 정착한 반면 ‘불필요한 야근’ 관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011년 회사 조사에서 본사의 경우 20% 정도가 저녁 8시 이후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특단의 대책이 ‘강제 소등’이다. 2012년 1월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빌딩숲 사이 한 건물의 6개 층 사무실 전등이 저녁 7시30분 일제히 꺼졌다. 유한킴벌리다. 오전 10시 출근자들의 퇴근시간인 저녁 7시에다 30분의 ‘탈출 시간’을 추가로 얹은 시각이었다. 김혜숙(49) 지속가능경영본부장은 “‘직원들이 퇴근을 안 한다’는 고충을 토로하자 최규복 대표가 ‘그럼 불을 꺼버리면 된다’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다.

지난 4일 저녁 7시께 찾은 유한킴벌리 본사 사무실의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남은 직원들도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손승우(49) 대외협력본부장은 “그전에도 수요일은 ‘육아 데이’라고 해서 일찍 퇴근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별 감응이 없었다. 만날 밤 9시, 10시에 퇴근하고 토요일에도 나와 일하며 살았던 탓이다. 소등제 실시 첫날 불이 꺼지는 데 충격을 받았다. ‘굳이 강제로 할 필요까지 있냐’는 불편한 감정도 있었다. 그런데 불이 꺼지니 정말로 퇴근이 빨라졌다”고 했다. 손 본부장의 아내 이순남(46)씨는 “예전에 비하면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아빠와의 대화시간이 늘면서 두 딸과의 관계도 좋아졌다”고 했다.

3년 전엔 본사 직원 가운데 20% 정도가 야근을 했지만, 그 비율은 최근 8%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손 본부장은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하는 직원들의 요구가 있어서 처음에 1개 층은 ‘야근층’으로 불을 켜뒀다. 하지만 점점 수요가 줄어서 지금은 각 사무실 일부에만 불을 켜둔다”고 했다. 김 본부장은 “강제 소등제를 통해 회사가 정시 퇴근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직원들에게 신뢰를 준 것 같다”고 했다.

»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유한킴벌리 직원들이 개인 좌석을 없앤 뒤 자유근무공간에서 업무를 협의하고 있다. 유한킴벌리 제공

하루 8시간 노동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데 따른 업무 공백이나 생산성 저하는 없었다. 유한킴벌리가 2011년 도입한 ‘스마트워크 시스템’이 주효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칸막이가 없는 개방공간 어디에나 자유롭게 앉아 일한다. 임원들을 비롯한 부서장들도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 안지연(38)씨는 “의사결정을 해주는 임원들이 주위에 있어서 언제든 다가가 의견을 구할 수 있으니 의사결정 과정이 단축되고 속도도 빨라졌다”고 했다.

1990년대 초반 입사해 임원까지 오른 김 본부장은 “1992년 첫아이를 가졌을 때는 임신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2002년에는 둘째를 임신한 채로 외부 손님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회사가 임신과 출산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신뢰가 있었다. 일하는 방식은 그대로 둔 채 직원들에게 ‘너만 바꾸면 돼’라고 하는 건 무의미하다”며 “사주나 상사의 의지가 있고, 시스템이 같이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한겨레 신문 2014년 11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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